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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그늘: "완벽한 사회"라는 이상적인 비전의 비판

by aurora007 2025. 4. 8.

완벽한 사회는 누구를 위한 유토피아인가. 그 이상적 비전이 품은 위험성과 현실을 왜곡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해 본다.

유토피아의 그늘: "완벽한 사회"라는 이상적인 비전의 비판

1. 유토피아의 그늘: 이상은 언제부터 억압이 되었는가

‘완벽한 사회’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인류의 꿈이었다. 전쟁과 빈곤, 차별과 범죄가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회. 이런 유토피아는 수많은 철학자, 사상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었고, 정치적 이상주의자들의 목표이기도 했다. 그러나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 완벽함은 누구의 시선으로 정의된 것인가? 모든 것이 ‘이상적’이라는 사회는 과연 모두에게 그렇게 느껴지는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러한 논의를 시작하게 만든 고전이다. 그는 평등하고 질서 있는 사회를 묘사하며 당시 유럽 사회의 모순을 풍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그린 유토피아에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제한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사회 속에서 개성은 최소화되고, 자율성은 체제 유지를 위해 통제된다. 이는 이후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문학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테마다. 오웰의 『1984』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완벽함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는 통제와 억압의 구조를 섬뜩하게 드러낸다. 문제는 ‘완벽한 사회’라는 비전이 일단 설정되면,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불편을 느끼는 사람은 비정상으로 간주된다는 데 있다. 이상에 맞춰 개인을 교정하거나 제거하려는 논리는 전체주의의 출발점이 되기 쉽다. 예를 들어, "모두를 위한 질서"라는 명분 아래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고, "사회적 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정체성과 문화가 말살되는 방식이다. 결국 이상이 현실과 만나기 시작하면, 그 균열은 특정 집단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상은 이상이 아니라, 하나의 도그마로 전락한다. 완벽한 사회는 종종 ‘문제가 없는 사회’로 묘사되지만, 실상은 ‘문제를 말할 수 없는 사회’가 되기 쉽다. 모든 시스템이 이상적이라는 전제가 깔린 순간, 그 체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행위는 곧 ‘위협’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비판이 결여된 사회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진정한 이상은 질문을 허용하는 체제여야 한다. 완벽함이란 모든 것이 채워진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개선 가능하고 수정 가능한 상태여야 한다.

2. 사회적 통일성이라는 환상: 다양성을 제거한 평등의 모순

완벽한 사회를 그리는 많은 비전에는 공통된 전제가 하나 있다. 바로 ‘모두가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회가 평등하고 조화로우려면 개인의 성격, 가치관, 문화, 행동 양식이 일정 수준 이상 유사해야 한다는 가정이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이상적인 그림처럼 보인다. 모두가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며 충돌 없이 살아가는 모습은 평화롭고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순간, 파괴적 결과를 낳기 시작한다. 다양성은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서로 다른 배경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충돌하고 협력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창조와 진보의 핵심이다. 그러나 완벽한 사회라는 틀 안에서는 이 다양성이 ‘불안 요소’로 취급된다. 시스템은 효율성과 일관성을 선호하며, 표준화된 행동과 사고를 요구하게 된다. 그 결과, 개인의 개성이나 문화적 정체성은 ‘다수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난다. 이러한 흐름은 실제 사회제도 속에서도 반복된다. 예를 들어, 교육제도가 모두를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하려 하고, 정치 체제가 ‘국민 전체’를 위한 법률이라는 명목 아래 소수의 권리를 후순위로 돌릴 때, 우리는 이미 ‘완벽한 사회’라는 이름의 위험을 체감하고 있는 셈이다. 진정한 평등은 모두를 같은 기준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동등한 존엄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적 비전은 이를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다양성은 불확실성을 낳고, 그 불확실성은 이상적 설계의 장애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일성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이 강제될 때, 그것은 곧 억압이 된다. 특정한 언어, 사고방식, 문화적 행동이 ‘정상’으로 규정되면, 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소외되고 배제된다. 완벽함을 지향하는 사회일수록, 그 경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냉혹한 잣대가 적용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완벽한 사회는 누구에게 완벽한가? 그리고 누가 그 기준을 정했는가?

3. 이상이라는 이름의 도피: 현실 회피의 위험성과 책임 회피

완벽한 사회에 대한 열망은 때때로 현실의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 도피에서 비롯된다. 현재의 불완전함을 견디기보다는,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그 미래를 향해 모든 문제를 미루는 태도는 종종 ‘이상주의’로 포장되지만, 사실상 책임 회피의 기제로 작용한다.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 모두가 행복해질 사회를 만들 것이다”라는 말은 달콤하지만, 지금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에는 아무런 위로도 주지 못한다. 이상은 목표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면죄부가 되어선 안 된다. ‘좋은 목적을 위한 과정’이라는 논리 아래 얼마나 많은 억압이 정당화되어 왔는가. 혁명의 이름으로, 개혁의 명분으로,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희생이라는 말로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고, 때론 생명을 잃기도 했다. 이상은 언제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만, 동시에 현실을 잊게 만들고, 행동보다 구호를 앞세우게 만든다. 완벽한 사회라는 개념은 또한 정치와 권력이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정책 실패나 시스템의 문제에 대해, “지금은 과도기”라는 말로 덮어버리고, “완성된 체제는 곧 올 것”이라는 메시지로 대중을 안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제를 수정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이상이라는 말은 마치 종교처럼 작동하며,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은 체제에 반하는 자로 낙인찍힌다.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일은 이상을 말하기보다는, 지금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작은 개선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완벽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야심 찬 선언보다는, ‘조금 더 나은 오늘’을 만드는 끊임없는 시도가 더 중요하다. 이상은 때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가리기 위한 커튼이 된다. 우리는 그 커튼 뒤를 들춰보고, 이상이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