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학 속 ‘피해자’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사회를 흔드는 목소리로 변모하고 있다.
1. 침묵의 대상에서 이야기의 주체로: 피해자의 새로운 서사
과거 문학에서 ‘피해자’는 흔히 고통의 상징이자 동정의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이들은 주로 강한 타자에 의해 억압당하고 고통받는 존재였으며, 독자는 그들의 아픔을 객관화하거나 심리적 위안을 얻는 구조 속에서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나 현대 문학은 이러한 서사적 구조를 뒤집는다. 피해자는 이제 더 이상 타인의 시선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의 목소리로 진실을 말하며, 문학을 통해 사회를 해석하고 바꾸려 한다.
이러한 변화는 피해자에 대한 인식의 진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과거에는 피해자가 ‘불쌍한 존재’로 전형화되었다면, 지금은 피해자의 경험이 고유한 지식이며 사회 변화의 시작점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예를 들어 김금희의 소설에서는 고용 불안정, 젠더 불평등, 감정노동의 현실에 내몰린 인물이 단순한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언어로 현실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중심 서사가 된다. 이들은 가해자와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고, 사회 전체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는 시선으로 확장되어 간다.
이러한 문학적 흐름은 독자로 하여금 피해자를 소비하지 않도록 요구한다. 감정 이입 이상의 것을 요구하며, 독자가 피해자의 언어와 입장을 진지하게 경청하도록 만든다. 피해자는 문학의 배경이 아니라 중심으로 이동했고,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슬픔에 그치지 않고 연대와 변화로 나아간다. 피해자는 지금, 문학 속에서 가장 강한 주체로 다시 쓰이고 있다.
2. 집단과 구조 속의 피해자: 시스템을 드러내는 문학
현대 문학은 피해자를 개인의 고통에만 머물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이 어떤 시스템 속에서 발생했는지를 조명하며, 피해를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사회의 결과로 파악하게 만든다. 이것은 문학이 단지 감정적 위로가 아니라 구조적 비판의 도구로 기능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손원평의 『아몬드』에서 주인공 윤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이로 등장하지만, 그가 겪는 세계는 감정을 느끼는 자들에 의해 조직된 불완전한 사회이다. 피해는 이 세계의 일그러진 구조에서 파생되며, 그 속에서 윤재는 단지 병리적 사례가 아니라 사회의 거울이 된다.
비슷하게, 정세랑의 작품에서는 젠더, 계급, 나이와 같은 사회적 구조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통해 피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준다. 피해자는 갑작스럽게 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시스템 안에서 배제되어 온 사람이다. 이처럼 현대 문학은 피해를 사건이 아닌 ‘결과’로 설명하며, 그 원인을 추적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를 위해 세밀한 묘사와 반복적인 일상을 통해 피해가 축적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중요한 점은 피해자의 서사가 단지 분노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고통을 사회적 분석으로 확장시키고, 이를 통해 집단적 연대를 시도한다. 이로 인해 피해자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품는 씨앗으로 재해석된다. 문학은 이런 과정을 통해, 구조적 불의에 대한 목격자이자 기록자가 된다. 피해자는 더 이상 스쳐가는 인물이 아니라, 문학이 시스템을 비판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화자다.
3. 피해자의 다층적 정체성: 서사의 균열을 허무는 존재
현대 문학이 그리는 피해자는 더 이상 단일한 고통의 표상이 아니다. 이들은 성별, 나이, 계급, 장애, 성 정체성 등 다양한 정체성을 복합적으로 지닌 존재로 등장한다. 즉, 피해는 단일한 조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교차하는 억압의 지점에서 더욱 복잡하고 입체적으로 구성된다. 이로써 현대 문학은 피해자를 통해 다양한 정체성의 충돌과 모순을 서사화하며, 독자에게 단순한 감정적 동조를 넘어선 사고를 요구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피해자를 다룬 소설이지만, 단지 한 시대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 소년은 단지 총에 맞은 희생자가 아니라, 폭력의 목격자이자 기억의 화자이며, 동시에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그는 그저 죽임 당한 존재가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타인의 삶을 흔드는 존재로 남는다. 이처럼 피해자는 죽음 이후에도 서사 속에서 살아 있으며, 침묵과 공백을 통해 더 큰 질문을 형성한다.
또한 문학은 피해자에게 ‘말할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서사의 균형을 재편한다. 가해자의 논리로 점철된 역사나 사회의 서사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피해자의 말은 때로는 더듬거리고, 불완전하며, 불편하지만, 바로 그 점이 진실의 형태로 다가온다. 문학은 이 불완전한 말들을 모아 완성도 높은 진실을 구축해 낸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피해자에 대한 전통적 인식을 제고하고, 그들이 문학에서 얼마나 강력한 서사적 존재로 진화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결국 피해자는 현대 문학 속에서 단지 과거를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움직이는 주체로 변모했다. 그들은 고통 속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의 서막을 여는 존재로, 가장 약하면서도 가장 강한 서사의 중심에 서 있다.